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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혜원의 문화路] 김기린 회화는 캔버스 위에 쓴 시(詩)

[전혜원의 문화路] 김기린 회화는 캔버스 위에 쓴 시(詩)

기사승인 2024. 07. 01. 13:34
'단색화 선구자' 김기린展, 갤러리현대서 선보여
"시의 운율 느껴지는 작품...가까이서 봐야 본질 알 수 있어"
18. [갤러리현대] 김기린 《무언의 영역》_전시 전경 이미지
'단색화의 선구자'로 불리는 김기린(1936∼2021)의 개인전 '무언의 영역'이 서울 사간동 갤러리현대에서 열리고 있다. 캔버스 위에 무수한 점들을 찍은 김기린의 작품은 시의 운율처럼 독특한 리듬을 갖고 있어 직접 봐야 그 진가를 알 수 있다. /갤러리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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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린의 작품은 사진으로 봐서는 그 본질을 느끼지 못할 겁니다. 갤러리에 와서 직접 봐야 이 회화의 본질을 알 수 있습니다." '한국 단색화의 선구자'로 불리는 김기린(1936∼2021)의 작품에 관해 탐구한 영국 출신 화가이자 평론가인 사이먼 몰리의 말이다.

김기린의 개인전 '무언의 영역'이 서울 사간동 갤러리현대에서 열리고 있다. 작가의 회화를 '화면 위에 쓰인 시(詩)'로 접근한 전시다. 그도 그럴 것이 김기린은 고등학교 때 불어 선생님이 들려준 랭보와 말라르메 등의 시에 빠져 대학에서 불문학을 전공했다. 1961년 프랑스로 유학을 떠났는데 생텍쥐페리를 연구하기 위해서였다. 김기린은 시를 쓰고자 했지만, 프랑스어로는 자신의 세계를 표현하기 힘들다는 생각에 시 대신 회화를 수단으로 택했고 미술사와 미술을 공부했다. 파리 국립고등장식미술학교에서 학위를 받은 그는 미술품 복원 전문가로 생계를 꾸리면서 자신의 세계를 회화로 풀어냈다.

김기린은 "나의 최종 목적은 언제나 시(詩)였다. 발레리, 랭보, 말라르메, 그리고 그 세대의 시인들 거의 모두를 좋아했다"면서 "나는 계속해서 시 작업을 했으나, 글이 아닌 그림을 통해서였다. 항상 시적인 이미지를 추구한다"고 언급한 바 있다.

15. [갤러리현대] 김기린 《무언의 영역》_전시 전경 이미지
김기린 개인전 '무언의 영역' 전시 전경. /갤러리현대
작가는 캔버스에 신문지로 기름기를 제거한 유화 물감으로 밑작업을 한 뒤, 큰 격자를 그리고 그 안에 다시 미세한 네모꼴을 만들었다. 마치 원고지에 시를 쓰는 것처럼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비슷한 크기의 색점을 찍고, 그 위에 색을 수십 번 반복해 칠하고 쌓아 올리는 방식으로 작업했다.

갤러리현대 관계자는 "조금씩 다른 모양과 질감으로 찍힌 색점들이 독특한 리듬을 만들어낸다"면서 "시의 운율, 박동 같은 것이 느껴진다"고 설명했다. 그의 작품을 완성하는 데는 최소 2~3년이 걸렸다고 한다. 한 가지 색을 사용하더라도 미묘한 변화가 있는데 이를 사진으로 담기가 어렵다. 때문에 갤러리 측은 "작품 사진을 배포하는 것이 의미가 있을까"라는 고민도 했다.

몰리는 "김기린의 작품은 보는 사람이 결정한다"면서 "그의 회화는 작은 글씨를 보려 다가가는 것처럼, 보는 사람을 적극적으로 초대한다"고 말했다.

5. [갤러리현대] 김기린
김기린 화백의 생전 모습. /갤러리현대
김기린은 늘 클래식 음악을 들으며 작업했다. 그에게는 음악이 곧 색이었다. 작가는 멘델스존을 들을 때는 노란색이, 차이콥스키의 음악에서는 회색이, 베토벤의 곡에서는 녹색이 떠오른다고 했다. 작품 속에 자주 등장하는 붉은 색은 그의 작업실에 남겨진 브람스의 LP판 표지색이기도 하다.

이번 전시에서는 1970년작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연작, 1980년대부터 세상을 떠날 때까지 계속했던 '안과 밖' 연작을 비롯해 그간 공개되지 않았던 종이에 그린 유화 작업 등 40여점이 공개됐다. 생전 가깝게 지냈던 박서보 화백이 1979년 한국 화단의 소식을 전하며 전시를 위해 작품을 보내 달라고 요청했던 편지, 프랑스 개인전 당시 현지 언론의 기사, 김창열 화백과 함께 찍은 사진, 작가가 쓴 시 등 다양한 아카이브 자료도 함께 볼 수 있다. 전시는 오는 14일까지.

14. [갤러리현대] 김기린 《무언의 영역》_전시 전경
김기린 개인전 '무언의 영역' 전시 전경. /갤러리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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